두 가지
- Jyun / KKHH
- Oct 28, 2015
- 3 min read
<되돌아온 편지>
한 달전쯤 엄마와 이야기를 나눴다.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거실에 앉아 창 밖을 보다가 엄마가 툭 하고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고보니 이 집에 산 것도 벌써 6년이 되어가네. 결혼한 후 지금까지 살았던 집 중에 가장 오래 산거야.”
“정말? 고작 6년이?”
하고 생각해보니 나는 이 집에서 살고 있지 않으니(엄마와 나는 따로 산다) 내가 한 집에서 가장 오래 머문 것은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 살았던 집으로 그 기간은 약 4년 정도로 기억된다.
나는 33살인데 내가 기억하는 것 만으로도 15번 이상 이사를 다녔을 만큼 참 많이도 이주했다. 물론 경제적인 이유(한국은 부동산 투기가 붐이었다. 지금도 역시 서민이 목돈을 만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복권을 제외하고는 집을 사고 집값이 오르는 것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운[i]이랄까, 그런 것들이 더 많이 작용했던 것 같다.
엄마 집에서 돌아온 후 다음날 나는 내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집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몇 일 후 편지는 다시 반송되어 왔기에(수취인 불명의 사유로) 미처 전달되지 못한 편지의 내용을 아래에 덧붙인다.
안녕하세요, 저는 주공아파트 1911동 1408호, 말하자면 제가 보낸 이 편지를 받으신 곳에서 7살부터 10살까지 4년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저는 올해 33살이 되었습니다.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26년전이니, 1989년도였겠네요. 아마도 더 정확한 사실은 주민센터를 찾아가서 관련 서류를 발급받아보아야 알겠지만, 제가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였습니다만) 입학을 앞두고 이사를 갔기 때문에 1989년도는 확실합니다. 아 어쩌면 88년도의 겨울일수도 있겠네요.
제가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저조차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제 모처럼 엄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엄마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결혼한 후 약 35년간 가장 오래 머무른 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고작 6년 이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꽤나 충동적으로 이 편지를 쓰고자 마음을 먹게끔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저한테는 지금 편지를 받으시는 분의 집, 1408호가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이거든요. 제가 태어나서 가장 오래 한 집에 머문 기간이 4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왜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집을 옮겨 다녀야 하는 걸까요. 저는 제 기억에만도 최소 15번 이상 이사를 다녔습니다. 기억이 불분명한 유년기를 찾아본다면 그 이상이 되겠죠.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이 편지를 받으신 분께 어떤 반응을 바라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끔찍할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자신이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장소에 관해 본인이 모르는 기억을 갖고 있는 상대에게서 연락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요. 집이란 그런 곳이잖아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지금 살고 계신 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여전히 지금도 내가 어떤 목적에서 이 편지를 보냈는지는 불분명하다. 사라졌거나, 사라질 것들 것 아니라 끈질기게 그곳에서 살아남고 있는 것들을 기록하기 위한 방법일수도 있다.
두번째 이야기는 위의 이야기와 조금 다른 것이지만 마찬가지로 살아남고 있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방치된 흙>
올해, 지난해, 그리고 그 지난해 집 앞 옥상에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화분을 몇몇 옮겨놓고 콩이며, 바질이며, 고수나 담배 같은 작물을 키웠더랬다. 식물을 키우는 사람은 일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하루를 맞이해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서 늘 식물들은 시들시들하고 힘이 없었다. 더운 땡볕 옥상에서 잎이 잔뜩 쪼그라져있다가 물을 주면 금세 다시 생기가 도는 모습에서 나는 기쁨보다는 죄책감 혹은 책임감을 느끼고 그것들을 살려내는데 급급했다. 그래도 기특하게도 작물들은 여름을 보내는 동안 음식에 넣어 먹을 수 있는 고수나 바질, 콩 몇 개나 빨갛게 익은 고추를 내놓고는 했다.
겨울에는 그대로 옥상에 내버려뒀다. 물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말라버린 딱딱한 흙에서 그 식물의 사체를 뽑아내는 일이 힘들어 그냥 방치해두었다. 그러다가 봄이 되면 나는 또 약간의 고민 끝에 (무책임하게도!) 몇몇의 씨앗을(또는 모종을) 심고는 했다.
나는 주로 새 흙을 사기는 하지만 그 지난 겨울에 그 메말라버린 흙은 뒤섞어 다시 쓰고는 했는데, 언제부턴가 올해 새로 심은 담배 화분에서 작년의 흔적이, 그러니까 콩과 바질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바쁜 여름을 보내는 사이 콩은 담배잎을 가려버릴 정도로 훌쩍 자라버렸고, 작년에 꽃이라는게 피었는지도 몰랐던 바질도 무럭무럭 자랐다. 뿐만 아니라 남은 흙은 비닐봉지에 담아 툭 던져놓았는데, 장마를 보내면서 언제부턴가 그 비닐봉지 안에서도 파란 싹이 돋더니 지금은 그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자라버렸다.
식물을 키우면서 동경했던 규칙적이고 성실한 삶은 지금의 나한테는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은 아침 저녁을 가리지 않고 효율 없이 바쁘기만 하다. 하지만 그런 열악함에는 아랑곳없이 무엇인가가 자라나고 있다.
나는 그 비닐봉지 안을 가득 메우며 자라고 있는 식물을 버릴 수도, 그렇다고 더 잘 자라라고 응원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였다. 나는 아마도 그것 역시 자연스럽게 겨울을 보내며 죽어버리기를, 그리고 그 다음에도 기대치 않은 무언가가 자라나는 것을 상상한다.
[i] ‘운’이라고 표현한 것은 5년 전 아버지의 죽음 이후 이사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중요한 이유 없이 이사를 많이 다녔는데,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의 팔자에 역마살(驛馬煞)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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